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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b.k. jeon
Subject   My stories in America: (10) 공장생활

   (10) 공장생활

  공장생활이 시작되었다. 먹고산다는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무엇이든지 돈벌이를 해야했다. 그러나 특별한 기술을 가진 것이 없고, 미국에 온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아 현장경험이 없는 내겐, 직장을 잡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미국 친구가 도와주어서 Paul Mueller 라는, 상업용 공업용 탱크를 제작하는 회사에 견습공(Helper)으로 취직이 되었다.
  이 회사는 스테인레스 스틸 강판으로 거대한 식수용 물탱크, 맥주발효탱크, 우유저장탱크, 기름수송탱크 등을 제작 판매하는 회사였는데, 나는 집채만큼이나 큰 맥주발효탱크를 제작하는 부서에서, 탱크에 골격이 되는 스테인레스 구조물을 강판에 전기 용접하는 것을 도와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조수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길이가 6m , 높이는 20 cm, 폭 15 cm  정도 되는 스테인레스 강판을 기계로 눌러만든 U자 모양의 물건을 씬너(Thinner)로 깨끗이 닦은 후, 충전 밧데리로 작동하는 지게차에 옮겨 실어다 거대한 전기 스팥 용접기(electric spot welding machine)위에 놓여 있는 스테인레스 강판 위에 엎어놓고 3cm 간격으로 점점이 용접을 하는 일을 숙련공과 함께 하는 일이었다. 조수로서는 큰 기술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무거운 쇳덩어리를 닦고 옮기고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랴!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동양인은 나 이외에 다른 한사람이 더 있을 뿐이어서 눈에 띄는 데다 백인직장동료들의 관심이 대상이 되어, 꾀를 피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빈둥거리는 성격이 못되어 주위를 쓸고 닦으며 나는 정말 열심히 일을 하고 또 하였다. 무거운 쇠를 옮기고 다루는 일은 사실 내 동양인의 체력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아무 데나 주저앉고 싶을 만큼 이미 지쳐 있었고, 점심으로 먹는 빵 조각이 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밥과 반찬을 싸올 수도 없었다. 그 냄새에 질색을 하는 미국 직장동료들 앞에서 한국 음식이나 도시락을 먹는다면 당장 야만인취급을 받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함께 일을 하던 미국인은 Bob이라는 30대 중반의 사람이었다. 이미 그 나이에 이혼을 네 번이나 했다는 독일계의 이 중년은 사람도 좋고 성격도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농담을 좋아하고, 장난기가 심하다는 것 외에는 같이 일하기에 큰 불편이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친구는 무거운 물건을 운반 할 때 쓰는 밧데리 파우워로 움직이는 지게차를 "옐로우 독(Yellow Dog)"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헤이 B.K.! Yellow dog으로 이것을 저리로 옮겨 줘!", "Yellow dog 좀 이리 가져와!", 하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그 지게차가 노란 페인트칠이 되어 있어 그렇게 부르려니 생각을 했다. 또 그는 같이 일을 하거나,  어디를 갈 때  툭툭 내 작업화를 장난으로 걷어차며 키들거리기를 즐겨 했다.   본래 사람이 그런가보다  가볍게 응대하며 지내던 어느 날, 문득 나는 미국인들이 동양인을 "Yellow" 라고 비하해서 부르고, "Yellow" 라는 말 자체가 비겁하고 겁이 많다는 뜻도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냈다. Bob은 우리가 사용하는 지게차에 Yellow dog 이라는 별명을 부쳐 부르면서, 나를 동양인이라고  은근히 놀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의 피는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어떻게 이 녀석에게 본때 있게 보복을 할까 생각했다. 나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며 며칠을 참고 기다렸다. "나쁜 놈! 네가 나를 그렇게 깔 봐! 오직 동양인이란 이유로 그렇게 나를 놀려! 책을 읽어도 너보다는 훨씬 많이 읽었고, 아는 것도 너 보다는 훨씬 더 많이 안다. 너 잘 걸렸다!"  분한 생각만 하면 당장 멱살이라도 잡고 패대기를 치고 싶었지만, 나는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해서 일격(?)에 복수를 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내 심중을 알리 없는 Bob은 여전히 나를 툭툭 치기도 하고, "Yellow dog"이란 말을 계속 사용하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2, 3일 후 쉬는 시간에 둘이 함께 화장실에 갈 때 일은 터졌다. 화장실 문을 열고 막 안으로 들어서는데,  옆에 있던 Bob이 또 내 다리를 제 구두로 툭툭 치는 것이었다. 나는 이때다 하고, 약간 뒤로 빠지며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엉덩이를 뒤에서 걷어찼다. 구두코에 발가락을 보호하기 위해 강철까지 들어 있는 무거운 작업화로 엉덩이를 걷어 채인 그는 그대로 화장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한 손으로는 아픈 엉덩이를 감싸쥐고 영문도 모른 채 나를 올려다보던 그에게 나는 싸늘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 아프지? Yellow dog을 이리 가져와 너를 옮겨 줄까?" 나는 구둣발로 그를 사정없이 밟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만일에 대비해서 싸움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한참을 몸을 비틀며 아파하던 Bob이 이제야 상황판단이 되었는지, 헐떡이면서 "I'm sorry!"를 연발했다. 그는 내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너 한번만 더 그러면 그땐 네 머리통을 날려 버릴 거야 ( Next time, I'll blow your head off!)!" 그는 머리를 끄덕거리며 엉거주춤 일어서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가 왜 당했는지 알고 사과를 한 이상, 공연히 시끄럽게 떠들어야 내 망신이고, 나만 고립 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Bob은 이 일을, 스스로 창피했던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는 모양이었고, 나에게 함부로 하는 일이 없었다. 나도 그를 괴롭힐 이유가 더 이상 없었고.....
  이후 나는 이 공장에서 1년 반을 더 일하게 된다. 입사한지 삼 개월 후 나는 남을 도와주는 조수의 직책에서, 연마공(Grinder)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여기서 연마공이란 용접한 거친 부분을 기계로 깎아내고, 스테인레스 본래의 색깔이 나도록 갈고 닦아내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일은 쇳가루와 먼지가 많이 나는 일이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도라 와서 거울을 보면 눈, 코, 귀에 까만 먼지를 뒤집어 쓴 피곤에 지친 내가 나를 서글프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에서 힘든 일을 해 본 일이 없던 나로서는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상당히 견디기 어려웠지만,  이 일이 내 미국생활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하고는 하루도 결근하는 일이 없이 열심히 일을 했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거대한 맥주탱크 안에 들어가서 쇠를 갈아내는 일이었다. 이들 탱크 안에는 문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서, 전혀 환기가 되지 않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온도가 섭씨 40 여도 까지 오르도록 탱크 안은 찜통 같이 더웠다. 그 안에 들어가. 마스크를 하고 쇠를 가는 것은, 보통의 인내심과 체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땀을 비오듯 흘리며 마스크를 쓰고 일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참다못해 마스크를 집어 내던지면 탱크 안의 뽀얀 먼지를 하루 종일 들여 마실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남보다 땀이 많은 나는 이 맥주탱크 작업에 진저리를 쳤지만 거의 매일 맥주탱크 안에서 일을 해야 했다. 땀을 많이 흘리니 자연히 물을 많이 마시게되어, 어떤 날은 몇 갤런의 물을 마신 날도 있었다. 그러면 식욕을 잃게되어 먹는 것이 시원치 않게 되고....처음 하는 심한 노동으로 내 몸에 체중이 점점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내가 일을 계속해야 했던 데는 당시의 미국 경제가 어려워 다른 직장을 잡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73년 말, 산유국들이 일제히 국제유가를 올린 소위 "1차 오일파동" 여파로 미국에도 불경기가 불어닥쳐 많은 기업이 도산을 하거나, 종업원들을 임시 해고했었다. 이런 상황에 직장이라도 하나있고, 잡(job)이 험한 대신 보수는 좋은 편이어서 생활이 되었으니 하는 수가 없었다.  그 다음 나를 버티게 한 것은 그 직장이 내가 일 할 평생직장이 아닌 일시적 직장이라는 이유이었다. 마치 적진에 상륙한 군인들이 제일 먼저 자기들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처럼, 나도 미국에서 비빌 언덕을 제일 먼저 마련해야 했었다는 것이다. 무일푼으로 와서 공부 할 돈도 벌고 먹고 살 방편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했던 나에게는, 비록 일은 힘들었어도, 그 직장은 적진 속의 거점 같은 것이었다. 내 직장의 미국동료들은 형편이 달랐다. 2주일에 한번 받는 월급봉투에 목을 매고 사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았다. 돈이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쓰는 방식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기도 했지만, 미국식 소비문화 속에서 살아온 그들에게는 돈이 있으면 쓰고 엔조이하며 산다는 통념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저축하며 허리끈을 졸라매는 우리의 생활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 중 미래에 투자하는 알뜰한 사람이 없을 리야 없겠지만, 평생을 그런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미국에는 의외로 많다는 것에 놀라게 되었다. 모든 것을 후불제로 살 수 있는 경제 하에서, 그들은 대부분 집도, 차도, TV도 다 외상으로 구입을 한다. 매월 버는 돈은 빗 페이먼트로 거의 다 나가고 실제로 통장에 여유현금이 좀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일을 했다. 어쩌다 주말에 오버 타임(over-time)이라도 있으면, 몸이 힘들어도 빼놓지 않고 일을 했다. 눈사람을 만들려면 최초의 눈덩이를 잘 만들어야 눈이 잘 뭉쳐진다. 나는 그렇게 나의 미국생활의 첫 번째 교두보에서 첫 눈덩이를 힘들게, 정말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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