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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b.k. jeon
Subject   My stories in America: (15) 물이 샘솟는 도시에서

*****이 글은 시리즈 수기형식으로 쓰고 있는 저의 미국생활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물이 샘솟는 도시에서

  나는 1973년부터 스프링필드(Springfield) 시, 미조리주에서 내 미국생활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스프링필드란 말은 한국말로 번역하면, "봄의 들(春田)"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서의 스프링필드는 "샘이 솟는 들(井田)" 이란 뜻이 된다. 실제로 스프링필드 지역 곳곳에 지하수가 분출하여 만들어진 냇물과 작은 호수가 많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우리가 쓰는 민물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천이나 호수 등 지표에 있는 물과, 지하 암반 층에 있는 지하수(Ground water)가 그것이다. 지하수는 오랜 세월을 두고 지표의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암반 층에 모여 생성되는데 이를 애콰퍼(Aquifer) 라 부르며, 자연히 지표로 분출되는 경우도 있고, 사람들이 굴착기로 땅을 깊이 파고 내려가 물을 펌프로 끌어올려 쓰는 경우도 있다. 미국에서 사용되는 민물의 20 %를 이 지하수에서 얻고있다고 하는데. 대개 농업용, 공업용이나 식수용으로 쓰여지고 있다. 그런데 이 지하수는 일년 내내 온도가 일정하다. 정확히 화씨 54도를 유지하고 있고 물이 맑고 수질이 좋아, 지하수가 샘솟는 곳에는 반드시 찬물에 서식하는 송어(Trout)가  번식을 하게 마련이다. 스프링필드 지역에는 이 지하수를 이용한 송어 양식장이 여러 곳 있었고, 송어낚시터가 많이 흩어져 있어서, 나는 이 도시에 사는 동안 송어회와 송어 매운탕을 시도 때도 없이 즐길 수가 있었다.

   나는 이 물이 샘솟는 도시에 살면서, 제일 먼저 후불로 산 비행기표 값을 갚아야 했다. 1973년 당시. 한국은 세계의 빈국 대열에 서 있었다. 대졸 초임이 미화 50 달러가 되지 않던 당시의 한국사정으로는 2천불이 넘는 두 사람의 항공 표를 현금으로 산다는 것은 보통사람들로서는 힘든 일이었다. 미국 이민 길에 오르는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자연히 후불로 항공 표를 사서,  열심히 일하며 매달 얼마씩을 월부로 갚아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많이 받지도 않는 돈에서 항공표 월부금 내고, 아파트비 낸 후에 또 한국에 부모님께 꼬박 꼬박 생활비를 보내드렸으니, 알뜰하게 살아도 저축할 여분이 별로 없었다. 자연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공장생활을 하며 살다가 공부를 할 것이냐, 아니면 좀 저축을 하여 조그맣게 라도 자영사업을 하면서 공부할 길을 모색하느냐 두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야 했다. 나는 자영사업 쪽으로 먼저 방향을 잡기로 했다. 공장 일이 힘들기도 했었고, 장래성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것이 그 쪽을 선택하게된 동기이었다.
   어디서든,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사업자금이 필요하다. 나는 먼저 돈을 만 불만 모아보자고 작정을 했다. 그 다음 무슨 사업을 할지를 결정하기로 하고 우선 돈부터 마련하는 것에 신경을 쓰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 불은 말이 쉽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당시로서는 대형 자동차 두 대 값이 되는 돈이었다. 목표는 정했으니 일을 더 할 수밖에......... 오버타임도 빼놓지 않고 하고 한국에서 가지고 온 동양화를 팔아 보겠다고 쫓아 다녀 보기도 했다. 그런데 마침 1973년 말, 제 1차 오일파동이 터져 버려, 미국 경제가 곤두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자연히 공장마다 감원, 일시해고선풍이 불어 닥쳤고 .나도 일시해고 되어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때는 이제 긴 겨울이 지나고 1974년 봄에 다가서고 있었다. 할 일이 없어 집안에서 몸살을 하다가, 어느 날 나는 백화점에 가서 간단한 낚시도구를 사서 호숫가로 나가기 시작했다. 큰 호수에서 고기를 잡으려면 배를 타고 깊은 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배가 있을 리 없는 나는, 호숫가 나무 그늘에 앉아 불루 길(Blue-gill)이나 퍼치(Perch) 같은 잡어를 잡는 것이 일이었다. 사실은 고기야 잡히든 말든 나는 시간을 죽이고 있었고, 곰곰이 내 살길을 생각도 하며, 다시 공장에서 나를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강태공처럼 곧은 낚시를 하며 "위수변에서 주나라 무왕을 기다리듯"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기에, 낚시를 한들 속이 편할 리도 없었고, 워낙 불경기이어서. 달리 다른  직장을 구하기도 어려운데다, 무슨 사업 같은 것을 시작할 형편도 못되었기 때문에, 갑갑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이 일시해고는 마냥  끝날 것 같지를 않았다. 무려 석 달이나 계속되더니 공장은 나를 다시 부르는 것이었다. 그 뒤 나는 1년 반을 더 이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일년 반 기간동안에 6개월을 일시해고로 쉴 수밖에 없었으니 당시의 불경기가 얼마나 심했느지를 알 수 있는 일이다. 이기간 동안에 나는 다시는 남의 밑에서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시 한번 더 하고 만다.
   일을 하는 곳에 따라 상황이 달라 질 수도 있겠지만, 남 밑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내 노동과 지식을 공여하는 대가로 보수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작더라도 내 자신의 사업을 하는 것이 훨씬 자유롭고 발전의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주말에 세인트루이스까지 달려가 식품을 사다가 한국, 일본, 필리핀 사람들에게 파는 것이었다. 당시 그 지역의 동양사람이래야 고작 백 명이 넘지 않았기 때문에, 돈을 번다는 것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고, 식품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쌓아, 미국인을 상대로 하는 동양식품. 선물 가게를 열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사실 주말에 드라이브를 하며 재미로 하는 보따리 장사 같은 것이었지만,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미국의 사업을 하나하나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런 우리의 소꿉장난 같은 우리의 장사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교회에서 만난 스트리트 씨 부처였는데, 이들은 우리가 하는 일에 늘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되어 가는지  주시하고 있었다. 몇 개월 후, 나는 그에게 무슨 대화 끝에 작은 동양가게를 하나 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 줬다. 그는 자본금은 얼마가 드느냐, 무슨 아이텀을 취급할 것이냐, 마케팅은 어떻게 할 것이냐, 현재 모아 논 돈은 얼마냐 되느냐는 등의 질문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조목조목 이야기는 해 줬지만, 자본금에 대해서는 은행에 3천불 정도밖에 없어 영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일을 계속해서 자본금이 만 불 정도 모이면, 그때 가게를 낼 계획이라고 말을 해줬다. 내 말을 끝까지 경청한 그는 자기가 어떻게 나를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여운을 남기는 것이었다.
   며칠 후, 그는 나를 자기 거래은행에 데리고 가서, 은행 부행장을 소개해 주는 것이었다. 종업원이 800명 이상 되는 회사의 사장인 스트리트 씨와 부은행장은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았다.
   "죠! 여기 있는 내 친구, B. K. Jeon이 조그만 사업을 생각하고 있어! 내가 보증을 설 터이니, 필요한 만큼 대출을 해 주게!  나는 B. K 가 꼭 성공할 것이라 믿고 있네. 자네도 알다시피 나도 적수공권으로 시작을 하지 않았나. B. K는 지금 도움이 필요하네."  
   서류 한 장에 싸인을 했더니 5천불을 내 통장에 입금을 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빨리 뭐가 될 줄은 예상하지도 못한 일 이어서 나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이렇게 나는 스트리트 씨의 도움을 받아 그후 25년간 계속되는 사업 쪽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나는 그 날 스트리트 씨가 어떻게 무엇을 믿고 나를 밀어 주었는지 항상 궁금해했다. 그러나 , 나는 그가 조그만 가능성을 보고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를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고,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있었으며, 열심히 사는 것에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작은 위험을 무릅썼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의 도움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지쳐 있는 사람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등을 조금 밀어주는 것은  있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조그만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보통의 사랑과 마음의 넉넉함만으로는 이런 일을 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나는 뒤에, 이 점을 생각하고,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다. 조금 등을 밀어주면, 조금만 끌어주면 웬만한 사람은 일어서는 것이 보통이다. 세상은 서로 나누며 서로 도우며 살 때 살만한 곳이 된다는 것을 나는 스트리트 씨로부터 배웠던 것이다. 나도 받은 만큼 나누며 살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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